아시오 광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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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오 광독 사건은 1877년 일본 아시오 광산 개발 과정에서 발생한 공해 사건이다. 후루카와 이치베가 근대 기술을 도입하여 광산을 확장하면서 유해 물질 배출로 인해 주변 환경과 농작물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농민들의 반대 운동과 정부의 미흡한 대처 속에서 다나카 쇼조를 중심으로 한 광독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와타라세 유수지 건설, 식림 사업 등 정부 대책이 시행되었으나,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오염 물질 유출 등 피해는 지속되었다. 이 사건은 소설,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루어졌으며, 한국의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및 민주화 운동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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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오 광독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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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사건 개요 | |
명칭 | 아시오 광독 사건 |
일본어 명칭 | 足尾鉱毒事件 (아시오코오도쿠지켄) |
배경 | |
원인 | 아시오 광산의 광독 |
발생 지역 | 와타라세강 유역 |
피해 지역 | 도치기현, 군마현, 사이타마현, 이바라키현 |
경과 | |
주요 사건 | 1877년: 아시오 광산 매수 후 개발 시작 1890년: 첫 번째 광독 문제 발생 1891년: 제1회 제국의회에서 광독 문제 거론 1897년: 다나카 쇼조, 중의원 의원 사직 후 광독 고발 운동 시작 1902년: 정부, 와타라세강 하류의 야나카촌을 유수지로 결정 후 강제 수용 1913년: 다나카 쇼조 사망, 광독 문제 해결 노력 지속 |
관련 인물 | 다나카 쇼조 고토 쇼지로 나카무라 산시로 가와카미 젠자부로 스가누마 사다오 기노시타 나오에 무쓰 무네미쓰 |
영향 | |
환경적 영향 | 와타라세강 유역의 토양 및 수질 오염, 농작물 피해, 생태계 파괴 |
사회적 영향 | 농민들의 생활 기반 상실, 이주, 질병 발생, 사회 불안 |
법적/제도적 영향 | 일본 최초의 공해 문제, 환경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 관련 법규 제정의 계기 |
관련 정보 | |
현재 상황 | 오염 지역 복구 노력 지속, 와타라세 유수지 조성 |
참고 자료 | 와타라세 유수지 아시오 광산 |
관련 전시 | 「다나카 쇼조가 사랑한 것」전 (2020년 11월 29일까지) |
2. 사건 경위
메이지 유신 이후, 후루카와 이치베가 아시오 광산을 경영하면서 서구의 근대 광산 기술을 도입했다. 아시오 광산은 일본 최대의 광산이자 동아시아 제일의 구리 산지가 되었고, 당시 구리는 일본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로 전국 구리 생산량의 4분의 1을 차지했다.[8]
그러나 광산 개발은 주변 환경에 심각한 피해를 초래했다. 제련 과정에서 발생하는 매연과 광독 가스(주성분은 이산화황)는 주변 산림을 황폐화시켰다. 광독 가스와 그로 인한 산성비 때문에 아시오 정(당시) 부근의 산은 민둥산이 되었고, 나무와 토양을 잃은 땅은 계속해서 무너져 내렸다. 이는 21세기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8] 붕괴된 토사는 와타라세강 하류에 퇴적되어 아시카가시 부근에서는 천정천이 형성되었고, 이는 1947년 카스린 태풍으로 인한 홍수의 주원인이 되기도 했다.
광산에서 배출되는 유해 물질(주성분은 구리 이온 등의 금속 이온)은 와타라세강을 오염시켰다. 1878년과 1885년에는 와타라세강에서 은어가 대량으로 폐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에는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1885년 토치기 신문은 아시오 지역의 나무가 말라가고 있다는 것을 보도하며 광산 개발과 환경 오염의 연관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이후 와타라세강 물을 사용하는 농경지나 홍수로 인해 광산 토사가 퇴적된 농경지에서 벼가 말라 죽는 피해가 잇따랐다. 1890년과 1896년의 대홍수 때는 피해가 더욱 심각했다. 광독 피해는 와타라세강 유역뿐만 아니라 에도천을 거쳐 도네천, 가스미가우라호 방면까지 확대되었다.
1892년 코자이 요시나오 등의 조사 결과, 광독의 주성분은 구리 화합물, 산화철, 황산으로 밝혀졌다.[5]
1973년 구리 채굴이 끝나 아시오 광산은 폐광되었고, 공해는 감소했다. 그러나 제련소 조업은 1980년대까지 이어져 광독 피해는 계속되었다.[8] 1989년 JR 아시오 선의 화물열차 운행이 중단되면서 원료 광석 반입량이 감소하여 광독은 더욱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인 2011년 3월 11일, 1958년에 붕괴되었던 겐고로 늪 퇴적장이 다시 붕괴되었다. 이로 인해 광독 오염 물질이 다시 와타라세 천으로 유출되었다. 지진이 원인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사항은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하류의 농업용수 취수 지점에서 기준치를 초과하는 납이 검출되었으며, 퇴적장과 와타라세 천 사이에 있는 와타라세 계곡철도 선로가 파손되어 철도 운행이 중단되었다.
2. 1. 광산의 근대화와 광독 공해 발생
메이지 유신 이후, 1877년 후루카와 이치베가 아시오 광산을 경영하면서 서구의 근대 광산 기술을 도입하였다. 그 결과 아시오 광산은 일본 최대의 광산이자 동아시아 제일의 구리 산지가 되었다. 당시 구리는 일본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으며, 전국 구리 생산량의 4분의 1을 아시오 광산이 차지했다.[8]그러나 광산 개발은 주변 환경에 심각한 피해를 초래했다. 제련 과정에서 발생하는 매연과 광독 가스(주성분은 이산화황)는 주변 산림을 황폐화시켰다. 광독 가스와 그로 인한 산성비 때문에 아시오 정(당시) 부근의 산은 민둥산이 되었고, 나무와 토양을 잃은 땅은 계속해서 무너져 내렸다. 이는 21세기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8] 붕괴된 토사는 와타라세강 하류에 퇴적되어 아시카가시 부근에서는 천정천이 형성되었고, 이는 1947년 카스린 태풍으로 인한 홍수의 주원인이 되기도 했다.
광산에서 배출되는 유해 물질(주성분은 구리 이온 등의 금속 이온)은 와타라세강을 오염시켰다. 1878년과 1885년에는 와타라세강에서 은어가 대량으로 폐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에는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1885년 토치기 신문은 아시오 지역의 나무가 말라가고 있다는 것을 보도하며 광산 개발과 환경 오염의 연관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이후 와타라세강 물을 사용하는 농경지나 홍수로 인해 광산 토사가 퇴적된 농경지에서 벼가 말라 죽는 피해가 잇따랐다. 1890년과 1896년의 대홍수 때는 피해가 더욱 심각했다. 광독 피해는 와타라세강 유역뿐만 아니라 에도천을 거쳐 도네천, 가스미가우라호 방면까지 확대되었다.
1892년 코자이 요시나오 등의 조사 결과, 광독의 주성분은 구리 화합물, 산화철, 황산으로 밝혀졌다.[5]
1901년에는 아시오 정에 인접한 마츠키 촌이 연기 피해로 인해 폐촌되기도 했다.
2. 2. 피해의 확대
광독 피해는 1878년과 1885년 와타라세강의 은어 대량 폐사로 처음 나타났지만, 당시에는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2] 1885년 시모노 신문에서 아시오의 나무가 말라간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광산과의 연관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후 와타라세강에서 취수한 물을 사용한 밭이나 홍수 후 광산에서 흘러나온 토사가 쌓인 밭에서 벼가 말라 죽는 피해가 속출했다.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봉기를 일으켰고, 다나카 쇼조가 농민 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광독 피해는 와타라세강 유역뿐 아니라 에도강을 거쳐 도네강 유역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1890년과 1896년 대홍수 때 농작물 피해가 심각했다.
1892년 고자이 요시나오 등의 조사에 따르면, 광독의 주성분은 구리 화합물, 산화철, 황산이었다.[5]
2. 3. 폐광
1973년 구리 채굴이 끝나 아시오 광산은 폐광되었고, 공해는 감소했다. 그러나 제련소 조업은 1980년대까지 이어져 광독 피해는 계속되었다.[8] 1989년 JR 아시오 선의 화물열차 운행이 중단되면서 원료 광석 반입량이 감소하여 광독은 더욱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당시에는 과학적인 분석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공해의 구체적인 내용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인 2011년 3월 11일, 1958년에 붕괴되었던 겐고로 늪 퇴적장이 다시 붕괴되었다. 이로 인해 광독 오염 물질이 다시 와타라세 천으로 유출되었다. 지진이 원인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사항은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하류의 농업용수 취수 지점에서 기준치를 초과하는 납이 검출되었으며, 퇴적장과 와타라세 천 사이에 있는 와타라세 계곡철도 선로가 파손되어 철도 운행이 중단되었다.
3. 정부의 광독 대책
다나카 쇼조가 1891년부터 국회에서 광독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적극적인 대책을 시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1891년에 아즈마 촌민들이 작성한 광독 기록집 《아시오 동광 광독·와타라세 천 연안 사정》을 발매 직후 금지시키는 등 언론 탄압에 주력했다.[9]
3. 1. 제1차 광독 대책 (1897년)
1897년, 광독 피해 지역 농민들의 대규모 도쿄 진정(당시 표현으로는 밀어내기)으로 여론이 높아지자, 정부는 아시오 동광 광독 조사 위원회를 설치하고 여러 차례 광독 예방령을 내렸다.[9] 특히 1897년 5월의 제3차 예방령은 후루카와 측에 배수 여과지·침전지 및 퇴적장 설치, 굴뚝에 탈황장치 설치를 명령했다. 이들은 모두 수십 일 기한으로, 하나라도 늦으면 폐광한다는 내용이었다. 후루카와 측은 당시 귀했던 전등 등을 활용해 24시간 체제로 공사를 진행하여 기한 내에 완료했다.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9] 정부는 오랫동안 이 예방령에 의한 공사와 후술할 와타라세 천의 개수 공사(1927년 준공)로 광독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주장했지만, 1993년 환경백서에서 당시의 대책이 불충분하여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구체적으로, 여과지와 침전지는 이듬해인 1898년에 붕괴되어 다시 하류로 광독이 흘러나왔다. 굴뚝의 탈황 장치도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기능하지 않아 효과가 거의 없었다. 퇴적장에서 광석 부스러기가 유출되는 문제는 이미 1902년의 제2차 광독 조사 위원회에서 지적되었지만, 제2차 광독 조사 위원회는 그것을 별로 문제 삼지 않았다.
피해민 일부는 광독 예방 공사의 효과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다시 반대 운동을 시작하여, 1898년 9월 세 번째, 1900년 2월 네 번째 대거 상경 청원 행동(밀어내기)을 감행했다. 네 번째 밀어내기에서는 농민 측과 경찰 측이 충돌해 대거 체포자가 발생했다(가와마타 사건). 그러나 1901년 가을에는 공사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해 농지가 많이 회복되고 있다고 신문에서 보도했다. 예를 들어, 10월 6일자 《도쿄 아사히》에서는 “극심한 피해 지역을 제외하고는 매우 풍작”이라고 나와 있다. 다만 이러한 보도에 대해서는, 당시 언론의 취재 능력상 와타라세 천 연안 전역을 조사했다고 볼 수 없고, 일부 지역의 정보에만 바탕을 한 것이라는 지적이 이루어지고 있다.
제1차 광독 조사 위원회는 이 외에도 광독 피해민에 대한 세금 면제를 시행했다. 이는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지만, 이 조치 때문에 선거권을 잃은 사람이 속출(당시에는 일정액의 직접세를 상납하지 않으면 선거권을 얻지 못했다)하여, 아무도 입후보하지 못하여 촌장을 뽑지 못하는 마을이 나오는 등 폐해가 발생했다.
3. 2. 제2차 광독 대책 (1902년)
다나카 쇼조는 히비야에서 메이지 천황에게 아시오 광독 사건에 대해 직소했지만 경비 경찰에게 붙잡혀 실패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도쿄 시내를 발칵 뒤집히게 했고, 호외가 발행되며 직소 내용이 널리 알려졌다.[8] 다나카의 직소 이후, 학생 단체들이 잇따라 아시오를 견학하는 등 여론이 높아지자, 당황한 정부는 1902년에 제2차 광독 조사 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는 1903년에 1897년의 예방령 이후 광독은 감소했다고 결론짓고, 홍수를 막기 위해 와타라세 천 하류에 광독 침전용 대규모 ‘유수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9] 그러나 제2차 광독 조사 위원회는 예방령에 의한 공사로 광독이 감소했다고 결론지었을 뿐, 광독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지는 않았다.조사 위원회는 “작물에 피해를 주는 구리 성분은 예방 공사 전의 잔류분으로, 현재 조업에 의한 것은 적다고 보아 후루카와 광업의 책임을 해제했다”[9]고 발표했다. 하지만 1903년 10월, “피해 지역의 벼는 풍작”이라는 주장에 대해 다나카 쇼조는 “피해지 풍작의 실태”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반박했다.[10] 그는 연설에서 “풍작의 원인은 결단코 공사의 효과가 아니다. 작년의 대홍수에 의한 산사태로 새 흙이 피해 농지에 겹쳐졌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으며, 이 주장은 2006년 현재 일본 국토교통성도 지지하고 있다.
한편, 군마현 야마다 군 측의 광독 피해는 오히려 증가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다이쇼 시대에 제련 방법이 부유선광법으로 변경되면서 와타라세 천을 흐르는 광석 부스러기의 입자가 작아져 강물에 떠내려가기 쉬워졌고, 이로 인해 상류의 와타라세 천 우안에 많이 유입되어 퇴적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당시 광독이 줄어든 것처럼 보도된 것은 광독 초기에는 야마다 군이 심각한 피해 지역으로 간주되지 않아 언론의 취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제2차 광독 조사 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라 도치기현, 군마 현, 사이타마현, 이바라키현의 경계에 광독 침전용 와타라세 유수지가 건설되었다. 당초에는 사이타마 현에 건설될 예정이었으나, 주민들의 거센 반대로 도치기 현으로 변경되었다. 이 땅은 원래 농업을 주된 산업으로 하던 도치기 현 시모츠카 군 야나카 촌이었다.
야나카 촌은 다나카 쇼조가 살고 있던 곳이자 공해 운동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유수지 건설 결정은 공해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야나카 촌 주민들은 격렬하게 저항하며 주변의 후지오카 정과의 합병안을 부결시켰으나, 결국 1906년에 강제 폐촌되어 후지오카 정에 합병되었다. 이와 함께 와타라세 천의 하천 공사도 진행되었다.
1910년부터 1927년까지 야나카 촌을 유수지로 만들고 와타라세 천의 물길을 바꾸는 등 대규모 하천 공사가 진행되어 홍수는 감소했다. 그러나 아시오 산에서 유출되는 토사가 하류에 퇴적되는 현상은 멈추지 않았고, 하류 지역의 광독 피해가 줄어들었을 뿐 새로운 광독 유출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부가 이러한 당시 대책의 불충분함을 인정한 것은 1993년에 이르러서였다.
3. 3. 전후 대책
1947년 카트린 태풍 이후 정부는 와타라세 천 전역에 제방을 만들었다. 이 제방 공사는 20년 정도 걸렸으며, 제방 준공 이후 와타라세 천에서 대규모 홍수는 없었다.토사 유출을 막기 위해 1960년, 아시오 정에 사방댐인 아시오 댐이 만들어졌다. 부피 500만 입방미터로, 도네 천 수계의 사방댐으로서는 최대였다. 또한 일본에서도 최대급의 사방댐이라고 한다. 2003년 현재 퇴사율은 67%이다.
와타라세 천의 치수와 수도권의 수도 공급을 주 목적으로 한 다목적 댐인 쿠사키 댐이 와타라세 천 상류의 군마 현 세타 군 아즈마 촌에 만들어졌다(1977년 준공). 이 댐은 광독 대책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참의원 의원 콘도 에이이치로(당시)가 상공위원회에서 질문한 결과, 이 댐에 대해서 “수질 보전에 특히 유의”하는 것으로 되었다.[8] 광독을 하류로 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반원통형 복합 롤러도 채용되었다. 이 댐은 상시 수질 검사가 행해져 결과가 수시로 공표되어 있지만, 그런 다목적 댐은 일본에 거의 없다. 준공이 동광 폐광 후인 점도 있어 수질 검사에서 이상한 값은 많이 검출되지는 않았다.
1976년 7월 30일, 군마현, 도치기 현의 기류시, 오타시와 후루카와 광업 사이에 공해 방지 협정이 체결되었다. 다만 모리타 지구 광독근절 기성동맹회는 이 협정에 참가를 거부했다.[8] 이 협정에 근거하여 수질 검사 등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광독 피해 지역 농지의 토지 개량도 공해 방지 협정 체결 후에 이루어졌다.
또한 협정에 근거해 수질 검사 결과 강우시의 퇴적장의 수질이 환경기준을 넘고 있는 것이 있음을 군마 현이 2005년에 지적하였다.
4. 식림 치산 사업
황폐해진 아시오 지역의 삼림을 복원하기 위해, 1897년 당시 농상무성에서 아시오에 식림을 실시한다고 발표했고, 이후 2006년 현재까지 치산사업이 계속되고 있다. 다만, 메이지 시대와 쇼와 초기에는 숲이 제대로 조성되지 않은 기간이 몇 년씩 있었다.
치산 사업에 들어간 비용(황폐지 복구 비용)은 마에바시 영림서(현재의 관동 삼림관리국 군마 삼림관리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기간 | 비용 (엔) |
---|---|
1897년 ~ 1899년 | 31111JPY |
1906년 ~ 1912년 | 405917JPY |
1914년 ~ 1926년 | 99590JPY |
1927년 ~ 1940년 | 163484JPY |
1947년 ~ 1975년 | 1659574000JPY |
1976년 이후에도 식림 사업은 계속되었다. 마에바시 영림서의 치산 사업은 국유림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이 외에도 도치기 현이 1958년경부터 별도로 민유지에 치산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도치기 현이 식림하고 있는 사유지는 대부분 후루카와 기계금속의 소유지이다. 세금을 들여 사유지에 대규모 식림을 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1988년에 마에바시 영림서는 아시오 지역의 사방 사업에 2.94억엔을 사용했고, 도치기 현은 5.85억엔을 사용했다. 1999년에는 건설성이 아시오 지역의 치산사업에 20.3억엔을 사용했고, 도치기 현은 8억엔, 임야청은 2.5억엔을 사용했다.
이 외에도 후루카와 광업은 1960년에 국유림 복구에 대한 협력금으로 정부에 약 360만엔을 지불했다. 이는 1957년 ~ 1960년 분으로 지급되었으며, 그 이전의 부분에 대해서는 시효가 지났다는 해석이 내려졌다.
5. 후루카와 측의 주장
아시오 광독 사건은 주로 피해자 측 시점에서 기술되지만, 중립성 확보를 위해 후루카와 측 주장도 함께 제시한다. 후루카와 측은 광독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경우가 드물다. 후루카와 측 문헌 중 광독 관련 언급이 많은 것은 후루카와 광업이 간행한 《창업 100년사》(1976년)이며, 여기서는 '광독' 대신 '광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3]
이에 따르면 1740년에 이미 와타라세강 연안에서 광독으로 인한 세금 면제가 있었다는 것이 당시 문헌에서 확인되며, 광독은 후루카와 경영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당시 압력으로 문헌에는 없지만 1821년에 광독 피해가 있었다는 연구도 소개한다.[4]
후루카와 측 주장에 따르면 제1차 광독 조사회의 광독 방지령에 따른 공사와 다이쇼 시대까지의 와타라세 천 치수 공사로 광독은 "일단 해결되었다"고 한다. 당시 마치야바 양언보통수리조합 등의 광독 언급은 기술되어 있지 않다.[5]
겐고로 늪 퇴적장 붕괴 사고 후 모리타 지구 광독근절 기성동맹회와의 협상에 대해 (이전부터 광독 문제에 관해)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대처했다"고 주장한다. 후루카와 측이 시효 완성을 주장한 것은 언급되지만, 후루카와 광업이 카드뮴 오염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점은 언급되지 않는다(1976년 공해 방지 협정도 언급되지 않지만, 협정과 문헌 발행이 같은 해이므로 누락되었을 수 있다).[6]
6. 광독 반대 운동
1878년과 1885년 와타라세 천에서 은어가 대량으로 폐사하면서 광독 피해가 처음 나타났다. 당시에는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1885년 10월 31일 토치기 신문은 아시오 지역의 나무들이 말라가고 있다고 보도하며 광산과의 연관성을 제기했다.[8]
이후 와타라세 천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농경지와 홍수로 인해 아시오에서 흘러나온 토사가 쌓인 농경지에서 벼가 말라 죽는 피해가 잇따랐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여러 차례 봉기하였고, 다나카 쇼조가 농민 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광독 피해는 와타라세 천 유역뿐만 아니라 에도강을 거쳐 도네 천을 지나 가스미가우라호 방면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1890년과 1896년의 대홍수 때 논밭에 큰 피해가 발생했다.
1892년 코자이 요시나오 등의 조사 결과, 광독의 주성분은 구리 화합물, 산화철, 황산으로 밝혀졌다.[5] 1897년 3월 3일, 광독 피해 지역 주민 2000여 명은 도쿄로 도보 행진을 시작하여, 다테바야시, 사노, 고가 등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았다. 같은 날 800명은 도쿄 히비야에 집결하여 농상무성을 포위하고 광업 중지를 강력하게 청원했다. 5월 27일, 도쿄 광산 감독서는 광업주 후루카와 이치베에에게 광독 배제 명령을 내렸다.[3][4]
1901년에는 아시오 정에 인접한 마츠키 촌이 연기로 인한 피해로 폐촌되었고, 인근의 쿄조 촌, 닛타모토 촌도 비슷한 시기에 폐촌되었다.
와타라세 강 유역의 농민들은 광독 피해 배상과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운동을 꾸준히 전개했다.[8] 1958년 겐고로 늪 퇴적장 붕괴 이후, 모리타 촌을 중심으로 광독 반대 운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1971년 모리타 촌에서 수확한 쌀에서 카드뮴이 검출되어 출하가 정지되었다. 후루카와 광업은 카드뮴 피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군마현은 이를 단정했다.
6. 1. 메이지 시대
1878년과 1885년 와타라세 천에서 은어가 대량으로 폐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광독 피해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당시에는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1885년 10월 31일, 토치기 신문은 아시오 지역의 나무들이 말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하며 광산과의 연관성을 제기했다.[8]이후 와타라세 천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농경지와 홍수로 인해 아시오에서 흘러나온 토사가 쌓인 농경지에서 벼가 말라 죽는 피해가 잇따라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여러 차례 봉기하였고, 다나카 쇼조가 농민 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광독 피해는 와타라세 천 유역뿐만 아니라 에도강을 거쳐 도네 천을 지나 가스미가우라호 방면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1890년과 1896년의 대홍수 때 논밭에 큰 피해가 발생했다.
1897년 3월 3일, 광독 피해 지역 주민 2000여 명은 도쿄로 도보 행진을 시작하여, 다테바야시, 사노, 고가 등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았다. 같은 날 800명은 도쿄 히비야에 집결하여 농상무성을 포위하고 광업 중지를 강력하게 청원했다. 5월 27일, 도쿄 광산 감독서는 광업주 후루카와 이치베에에게 광독 배제 명령을 내렸다.[3][4]
1892년 코자이 요시나오 등의 조사 결과, 광독의 주성분은 구리 화합물, 산화철, 황산으로 밝혀졌다.[5]
1901년에는 아시오 정에 인접한 마츠키 촌이 연기로 인한 피해로 폐촌되었고, 인근의 쿄조 촌, 닛타모토 촌도 비슷한 시기에 폐촌되었다.
6. 2. 야나카 촌 강제 폐촌 (1906년)
다나카 쇼조가 살았던 야나카 촌은 광독 반대 운동의 거점이었다. 정부는 이러한 운동을 막기 위해 야나카 촌을 와타라세 유수지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야나카 촌은 이에 격렬히 저항하며 주변의 후지오카 정과의 합병안을 부결시켰으나, 결국 1906년에 강제 폐촌되어 후지오카 정에 합병되었다. 이와 함께 와타라세 천의 하천 공사도 이루어졌다.[9][10]6. 3. 다이쇼, 쇼와, 헤이세이 시대
와타라세 강 유역의 농민들은 광독 피해 배상과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운동을 꾸준히 전개했다.[8] 1958년 겐고로 늪 퇴적장 붕괴 이후, 모리타 촌을 중심으로 광독 반대 운동이 다시 활발해졌다.1971년 모리타 촌에서 수확한 쌀에서 카드뮴이 검출되어 출하가 정지되었다. 후루카와 광업은 카드뮴 피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군마현은 이를 단정했다.
1973년 아시오의 구리 채굴이 끝나고 폐광되면서 공해는 감소했다. 그러나 정련소 조업은 1980년대까지 이어져 광독은 계속 흘러나왔다. 1989년 JR 아시오 선의 화물열차 운행이 폐지되면서 원료 광석 반입량이 감소, 광독은 더욱 감소한 것으로 여겨진다.
2011년 3월 11일, 1958년에 붕괴되었던 겐고로 늪 퇴적장이 다시 붕괴되었다. 광독 오염 물질이 다시 와타라세 천으로 유입되었다. 일본 동북 대지진이 원인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때 하류 농업용수 취수 지점에서 기준치를 넘는 납이 검출되었다. 또한 퇴적장과 와타라세 천 사이에 있는 와타라세 계곡철도 선로가 파손되어 철도가 운휴했다.
7. 이 사건을 다룬 매체
아시오 광독 사건은 소설, 영화, 만화,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루어졌다.
- 소설
- 고바야시 큐조, 《암흑고지》(暗黒告知)
- 타테마츠 와헤이, 《독――풍문·다나카 쇼조》(毒――風聞・田中正造)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 수상, 도쿄서적, 1997년)
- 시로야마 사부로, 《신산》(辛酸) (다나카 쇼조와 아시오 광독 사건을 다룸)
- 영화
- 《광독》(鉱毒) (일본, 1976년)
- 《광독비가》(鉱毒悲歌) (일본, 1980년대)
- 《찢어지게 가난하다 ― 다나카 쇼조와 들에서 절규하는 사람들》(赤貧洗うがごとし ― 田中正造と野に叫ぶ人びと) (일본, 2006년)
- 《화장사 KEWAISHI》 (일본, 2002년)
- 《낡은 깃발》 (일본, 1974년)
- 만화
- 야스히코 요시카즈, 《왕도의 개》
- 휴가 야스시, 《끝없는 여행》 (후쿠인칸 일요일 문고, 상하권, 1978년)
- 드라마
- NHK, 『아시오에서 온 여자』 (2014년 1월 방송)
8.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요약과 참조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이전 결과와 동일하게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섹션 내용을 빈칸으로 둡니다.)
참조
[1]
뉴스
「田中正造が愛したもの」展 11月29日まで
https://www.asahi.co[...]
2020-11-29
[2]
서적
新聞集成明治編年史 第6巻(限定再版)
https://dl.ndl.go.jp[...]
林泉社
1940-00-00
[3]
뉴스
東京日日新聞
[4]
뉴스
中外商業新報
[5]
간행물
足尾銅山鉱毒研究 農学会会報16号
[6]
간행물
「技術導入の社会に与えた負の衝撃
http://d-arch.ide.go[...]
국연대학
1982-00-00
[7]
뉴스
くらしナビ・環境:足尾銅山の記録映画「鉱毒悲歌」、40年がかりで完成 苦難の闘い、証言で残す
http://b.hatena.ne.j[...]
はてな
2014-09-07
[8]
문서
[9]
서적
다나카 쇼조
[10]
서적
다나카 쇼조 전집·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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